|
-

일제가 태평양전쟁 말기 미군의 본토 상륙을 저지하기 위해 제주도 요새화를 추진하면서 건설한 알뜨르비행장의 비행기 격납고. 알뜨르 일원에는 비행장과 격납고, 고사포진지, 자살특공정 진지, 갱도 진지 등 일제가 조성한 군사시설이 산재해 있다. 사진=한국관광공사 제공 겨울바람이 스산하게 부는 제주 서귀포시 대정읍. 모슬포항에서 송악산으로 가는 너른 들녘을 가로질러 간다. 들녘에는 감자를 수확하는 농부들의 일손이 부지런하다. 그들 뒤로 작은 오름처럼 둥글게 솟은 콘크리트 구조물이 보인다. 이 구조물의 가운데 부분은 조각칼로 다듬은 것처럼 각지게 파여 있다. 이 구조물은 일본군이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 전투기를 숨겨놓기 위해 지은 격납고다.
1944년 7월 사이판이 미군에 함락되면서 태평양 전쟁은 서서히 종점으로 치닫는다. 미군의 본토 상륙이 가시화되자 일본은 본토 옥쇄작전을 대비한다. 일본 본토 전체를 전쟁기지로 만들어 최후의 한사람까지 싸우다 죽겠다는 각오를 다진다. 이 작전이 1945년 2월에 떨어진 ‘결호’(決號)다. 결호작전은 지역에 따라 결1호부터 결7호까지 나온다. 이 가운데 유일하게 일본 본토가 아닌 지역으로 제주도가 포함됐다.
일제는 본토를 방어하기 위한 마지막 거점으로 제주도를 선택했다. 이는 제주도의 지정학적 위치에서 비롯됐다. 제주도는 동북아의 중심에 위치하고 일본 남단 규슈와 중국 남부를 연결하는 직선항로 상에 놓여 있다. 따라서 미군이 제주도를 점령해 공·해군 기지를 건설하면 일본의 본토 수성은 희박해진다.
일제가 파놓은 가마오름의 갱도 진지. 곡괭이로 판 흔적이 역력하다.
1945년 2월 결7호가 발표되고 난 후 제주도의 일본군은 급증한다. 3000여명에 불과하던 일본군은 3월 2만명, 6월 6만5000명, 패전 당시인 1945년 8월에는 약 7만5000명에 이른다. 이들 가운데는 중국 만주에 있던 관동군도 포함됐다.
제주에 병력을 모은 일본은 요새 구축작업에 들어갔다. 우선 중일전쟁에 대비한 거점 비행장으로 건설한 알뜨르비행장을 대폭 확대했다. 본래 길이 1400m, 폭 70m, 면적 60만㎡이던 것을 220만㎡으로 키우고 지하 격납고와 전투사령실, 연료고, 탄약고 등의 지하시설을 구축한다.
지금 알뜨르비행장에는 당시의 모습이 선연하게 남아 있다. 이 가운데 비행기 격납고는 들판 가운데 무리지어 자리해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격납고는 20여기. 이 가운데 허물어진 1기를 제외하면 거의 원형에 가깝게 남아 있다. 특히, 1m의 두께로 지어진 격납고 지붕의 견고함은 마지막 저항에 나선 일제의 각오가 느껴진다.
송악산 해안절벽에 파놓은 카이텐 자살특공정 진지.
일제는 알뜨르비행장 확대와 함께 미군 상륙에 대비해 제주 전체에 거대한 지하 갱도진지를 구축한다. 제주에 남은 일제의 잔재를 집중취재한 한라일보 이윤형 기자에 따르면 368개의 오름 가운데 120곳에서 진지가 구축된 것이 확인됐다. 이 진지는 제주는 물론 뭍에서 일제에 의해 강제 징용된 조선인들의 손으로 구축된 것이다. 갱도 진지 가운데 한 곳이 평화박물관으로 개장해 일반인에게 공개되고 있다. 제주시 한경면 청수리에 있는 가마오름 지하요새가 그것. 이 요새는 일제에 징용돼 직접 갱도를 팠던 이영근 박물관장(55)의 부친인 이성환옹의 증언을 통해 찾아냈다.
가마오름 지하요새는 3층 구조로 총 길이가 2㎞에 이른다. 통로를 따라 수십 개의 방이 상하좌우로 연결되어 있어 일반인이 들어가면 빠져나올 수 없다. 출입구만 10개에 달하고, 공기가 순환할 수 있는 수직터널도 만들어 놨다. 또 적을 유인해 함정으로 떨어지게 하는 곳도 있다고 한다.
현재 개방된 곳은 300m 정도. 관람 편의를 위해 일부는 벽체를 목재로 마감했고, 조명도 설치했다. 또 구석구석에 갱도를 파거나 일본인들이 거주하는 모습 등을 밀랍인형으로 제작해 놨다. 그러나 편의시설을 갖추었다 놓았다지만 혼자 들어가면 등골이 오싹할 만큼 무섭다.
알뜨르비행장의 격납고가 있는 들녘에서 파종을 하는 농부.
갱도진지 구축과 함께 일본군이 최후의 보루로 만든 것이 해안특공정기지다. 지금은 마라도유람선 선착장이 있는 산수고동 송악산 해안절벽에는 큼지막한 굴이 14개가 파여 있다. 언뜻 보면 파도에 의해 자연적으로 형성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일제가 어뢰정을 이용해 미군 함정을 격침시키기 위한 자살특공대 ‘카이텐’을 감추어두려고 파놓은 진지굴이다.
카이텐(回天)은 폭약을 가득 실은 어뢰정이다. 이 어뢰정에는 죽음을 각오한 일본군이 1명씩 탑승한다. 어뢰정은 속도와 방향, 잠수와 부상 등을 자유자재로 조정할 수 있어 상대방의 함선과 충돌한 후 함께 침몰하는 자살 공격용 병기다. 말하자면 바다의 가미가재 특공대인 셈이다. 카이텐은 명중률 100%로 태평양 전쟁이 종전될 때까지 30여척의 미국 군함을 격추시켰다고 한다. 카이텐의 발사기지는 송악산을 비롯해 제주시 수월봉·성산 일출봉 등 5곳에 만들어졌다. 이처럼 일제의 본토 방어를 위한 제주 요새화 작업은 치밀하면서도 대규모로 조직됐다. 그러나 천만다행인 것은 미군이 제주도에 상륙하기 전에 일제가 항복했다는 것이다. 만약 제주에서 미군과 일제가 맞붙어 싸웠다면 그 참혹함은 상상을 초월했을 것이다. 현재 알뜨르비행장과 갱도진지, 격납고 등 12곳은 지난해 문화재청에 의해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한국관광공사 정봉섭 복합관광개발사업단장은 “알뜨르 비행장 일원의 일제 군사시설은 태평양전쟁과 관련된 군사시설 가운데 다양성과 규모, 집적도 면에서 최대 규모”라면서 “향후 역사문화를 테마로 한 관광지로 개발해 평화의 소중함을 느낄 수 있는 곳으로 만들어 가야할 것”이라고 말했다.
제주=스포츠월드 글·사진 김산환 기자 isan@sportsworldi.com








생활과문화




